여행의 이유
- 저자 : 김영하
- 태그 : 여행, 청춘
- ⭐️ : 3 / 5
“30살이 되면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자유롭게 여행하는 청춘이 되어있을 줄 알았는 데, 삶의 빡팍한 일정에 등떠밀리고 치이는 만성 패키지 여행객이 되었다.”
꼭 한 번은 읽고 싶었다.
알쓸신잡을 통해 김영하 작가님을 알게 되었고, 매순간 작가의 관점으로 흥미롭고 따뜻한 이야기를 꺼내는 작가님의 모습에 큰 매력을 느꼈다. 그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는 모든 분들이 각자의 매력을 갖고 있는 분이지만, 김영하 작가님은 그 중에서도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본 투비 여행객
서점에서 이 책을 지나칠 때마다. 언젠가는 김영하 작가님의 책을 한 번 읽어봐야지, 읽는 다면 이 책을 읽어야지 하고 생각했었다. 마침 그 당시에 읽고 싶었던 책이 서점에 없어, Plan B 로 이 책을 구매하게 되었다. 처음엔 여행기 인 줄 알았다. 책을 펴먼서 작가님은 어떤 재밌는 여행들을 해보았을까? 기대를 안고 읽어나갔다. 하지만, 이야기 내용은 여행기가 아니라 ‘여행’ 이라는 주제에 대한 경험과 생각이었다. 여행이 그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고,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를 본인만의 시선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실컷 하는 느낌이었다. 투머치 토커 여행 신봉자를 만났다고나 할까.
김영하 작가님이야 말로 본투비 여행객이다. 어렸을 적 잦은 이사로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짧은 시간 단위로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셨다. 그렇기에 어렸을 때부터 만나는 모든 인연은 헤어지고 서로에게 잊혀질 것을 당연히 여기게 되었고, 그 덕에 여행자의 관점으로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생긴 것 같다. 그 보다는 아니지만, 먼 지역의 고등학교, 다른 지역의 대학교, 또 다른 지역의 직장을 다니니면서 3~5년 마다 지역을 옮겨다니는 생활을 하고 있는 나로서도 작가님의 이야기가 더욱 공감이 갔다.
전업 여행자
나도 한 때는 전업 여행자를 꿈꿨다. 고등학교 시절에 금요일 저녁마다 부산 MBC 에서 방영했던 “좌충우돌 두 남자의 만국 유람기”라는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빨리 대학에 가고, 여행도 잔뜩 다니고 싶었다. 지역 방송으로 편성된 이 프로그램은 정말 평범한 부산 촌놈들(대학생, 연극배우, PD)이 함께 해외 여행을 떠난다는 것 외에 특별한 컨텐츠는 없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들이 바로 빠니보틀이오 곽튜브였다. 그 당시에는 어떤 직업을 갖고 싶다가 아니라, 평생 여행만 다닐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히 행복할 것만 같았다. 집과 학교가 주는 심리적 압박감과 답답함에서 얼른 해방되고 싶었다.
새로운 지역으로 대학교를 진학하고 잠깐의 자유를 느낀 것도 잠시, 세상의 무게와 일상의 압박감은 멀리 가지 않았고, 내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 중력처럼 언제나 있었다. 눈을 잠깐 감았다 뜨고 보니 나이 앞줄이 바뀌어 있다. 나에게는 일상의 무게를 아예 벗어두고 벌거숭이처럼 살 용기는 없다는 것을 이제는 깨달았기에 일상과 여행을 새로 정의하고 나만의 기준점을 만드는 성숙한 노력이 필요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이 책이 주는 여행에 대한 여러 아이디어가 많은 영감을 주었다. 특히 그림자로 표현되는 일상의 모습과 여행자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인간으로서 ‘그림자’의 필요성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부분이 좋았다. 모든 나무가 뿌리와 열매가 있고 각각의 역할이 있듯, 일상이 보이지 않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게 아니며 오히려 정말 중요하고 흔들리지 않아야하는 부분은 보이지 않는 법이다.
여행객으로 살기
인생은 내 뜻대로 되는 것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체험해가면서 나에게는 여행자보단 여행객이라는 표현이 더 좋다. 여행은 분명 내가 계획한 스케쥴 대로 착착 진행될 수 도 있겠지만, 전혀 다른 일들이 벌어지기도 한다. 또한, 세상을 경험하고 발을 내딛는 순간 나의 시야가 그 크기 만큼 늘어나기도 하지만, 외부 세계에서 보았을 때는 수 많은 손님 중 하나가 생겨났을 뿐이다. 아직은 아무래도 손님 중 하나가 되는 편이 좋다.
이 책을 읽으면서 또 하나 감명 깊었던 부분은 여행자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행자들은 본인의 성별, 나이, 인종으로 쉽게 구조화 되고 개인적 특성은 사라지는 ‘nobody’ 가 된다. 이는 누군가에게는 편안함을 누군가에게는 불편함을 선사한다. 하지만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는 여행자로서 ‘nobody’ 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기 힘들 것이다. (오히려 아예 그 곳에 정착하게 될지도..) 온전한 복귀를 위해선 기꺼이 ‘nobody’가 될 줄 알아야 한다. 작가님은 겸손과 모든 곳에서 ‘somebody’ 가 되는 것이 절대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떠나야 할 곳이라면, 그 곳에서 나의 역할은 ‘nobody’ 로 충분하다.
나의 삶 속에서 일상과 여행을 나름대로 정의해 본다면, 비일상의 순간들을 여행으로 정하도록 하겠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나의 삶의 시간 속에 여행의 비중을 큰 노력없이 늘릴 수 있을 것 같다.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고 싶어 대학원을 준비하였을 때, 회사에서 뜻하지 않은 근무지와 직무에 배치 되었을 때, 일상이 지겨워 아무 이유 없이 멀리 있는 카페에 가서 책을 읽을 때, 새벽 KTX를 타고 출근을 하면서 한강을 건널 때, 여행이라고 생각했다면 내가 느끼던 불편함들을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누구보다 여행객처럼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여행을 즐기면 되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