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올더스 헉슬리
  • 태그 : 소설, SF, 디스토피아
  • ⭐️ : 4 / 5

“쾌적하고 안락한 삶을 위해 인류가 치뤄야 할 대가가 철학과 예술이라면?”

4번째 수술로 입원해 있을때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선물해 준 책이다.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풍요의 상관관계

올더스 헉슬리의 미래세계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풍자적 소설이다. 소설속의 세상은 모든 것이 짜여진 계획 속에서 규칙적으로 돌아가고 모든 사람이 생로병사의 고통없이 안정과 행복만을 누리는 유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기술적, 기계적 법칙에 기초한 안락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회의 비효율과 혼란을 야기하는 미와 진리 탐구의 본능을 통제 당하였을 때, 하나의 개인이 어떻게 반응하는 가에 대해서 정말 몰입감 있게 표현한 책이다. 너무나 몰입감 있는 전개였고, 이 책을 1930년 대에 썼다는 점이 정말 놀라웠다. 2020년대의 현재 모습을 대입해보면, 작가의 상상력과 통찰력이 얼마나 깊고 날카로운지 잘 보여주는 것 같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구성된 세계의 신? 구성자? 의 이름이 포드인 것으로 보아서 포드가 만들어낸 분업 및 폭발적인 생산량 향상으로 인한 미래 사회의 모습을 표현한 듯 하다. 나도 현재 삼성전자라는 커다란 제조회사의 생산 시스템을 개발하고 운영하는 일을 하면서 헉슬리가 상상한 (이미 대부분 자동화 되어 있는) 시스템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그가 상상한 미래사회에 속에서 살면서 그가 던진 질문들에 답변해야 할 순간에 와있는 것 같다. 과연 인류의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정신적인 풍요로움은 반드시 양의 상관관계를 가질까? 이 책에서는 공동체의 효율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공동의 물질적 이익과 개인의 개성의 충돌을 보여주면서 두 풍요로움의 상충관계를 잘 보여준다.

불편함과 고통을 참으면 바보

현대 사회에는 분명 과거에 비해(과거라 해도 내가 기억할 수 있는 20여년 전) 점점 진리, 미와 같은 철학보다 안락함과 가벼운 행복(쾌락)을 추구하는 경향이 매우 커지고 있고 이 현상은 점점 가속화 되고 있는 것 같다. 문명의 발달로 인류는 이전과 같은 불편함과 고통을 더 이상 견뎌내야 할 필요가 없어졌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그와 같은 불편함과 고통을 피하는 방법이 널리 퍼져있다. 따라서 그러한 불편함을 견디는 사람은 모자라고, 수준 낮은 사람으로 취급하고 이를 쉽게 피해가는 사람들을 똑똑하고 대단한 사람으로 치켜세워 주는 사회가 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소설에서 처럼 모든 계급에게 평등하게 ‘소마’가 제공되지는 않는다. 아쉽게도 해당방법을 아는 소수에게만 그러한 어려움을 피해갈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고, 현대 사회에선 이를 통해 계급이 나뉘고 사람들은 그 방법을 갖기 위해 경쟁하는 것 같다.

진리나 아름다움이 아닌 쾌적과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

그렇다면 왜 점점 진리, 아름다움보다 쾌적과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가 되었을까? 나의 경우에도 분명 어릴 적에는 쾌적과 행복보다 진리나 아름다움 같은 이상을 추구했던 것 같다. 물리학자가 되고 싶었고, 축구선수가 되고 싶었고, 내가 사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보고자 하는 꿈을 꾸었다. 하지만 20대를 보내고 30대를 시작하는 지금, 어느 순간 눈앞의 쾌적함과 작은 행복을 좇고 있는 나의 모습을 마주한다. 세상에 수 없이 부딪히면서 꿈이라는 단어가 주는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에 지친 것 같다. 지쳤다는 것의 다른 말은 경험했다는 것이고 그 경험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개인처럼 사회도 점점 노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안타깝게도 현대사회는 개인보다 더 빠르게 노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세상이 너무나 다원화 되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나라 다른 문화들을 여행하고 경험하게 되면서, 자신이 만들어놓은 개념 사회 속에서 추구하던 가치들이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나의 답에서 여러 개의 답으로 여러 개의 답에서 수 없이 많은 답으로, 결국 아무런 답도 선택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 같다. 그렇기에 소설에서처럼 행복과 안락을 위해 진리와 미를 포기했다기보다는 진리와 미의 기준이 모호해지고, 종국적으로는 기준자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희미해진 기준 속 모든 인간 사회에서 공통적인 가치로 합의될 수 있는 유일한 가치로 가장 근본적인 욕구인 쾌락과 안정만 남게 되었다. 좋아요로 표현되는 짧은 몇 초간의 인상만이 세상의 보편적인 가치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눈치 공동체주의

소설에서는 전체주의적 사상을 통해서 아주 안정적으로 세상을 안락하고 행복하게 유지시킨다. 대한민국에서 ‘눈치’ 라는 사회적 장치는 우리 사회의 안정성을 보장해주지만, 한편으로는 ‘전체주의’ 의 또다른 형태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은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과 다른 사람의 눈초리를 받는 것을 극도로 기피하도록 교육하는 사회이다. 우리나라처럼 치안도 좋고 분실물을 잘 찾아주는 나라는 전세계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끊임없이 비교하는 문화를 낳았고, 무한 경쟁에 개인을 몰아넣었으며, 낮은 행복지수로부터 출발해서 높은 자살률과 심각하게 낮은 출산율로 이어지는 중이다. 참 아이러니 하게도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 사회에는 다원화로 인한 혼란스러움과 과도한 눈치보기로 인한 경직성이 모두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인터넷 속에서는 서로의 정보들이 넘쳐흐르고, 모두가 모두의 시선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한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많은 연결이 실재하고 있는 “Overconnected” 된 사회다. 다른 사람들이라는 개념적인 주체에 의해서 개인의 의견은 철저히 묵살되는 “아무도 이익을 보지 못하는” 특이한 형태의 공동체주의가 아닐까.